Post

이름짓기 3. 작명 (作名)

나의 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꼭 1년 후에 태어났다.

그 사실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생명의 자리가 비고, 다시 생명의 자리가 채워지는 데 1년이 걸린 것 같기도 했다. 한 사람은 떠났고, 한 사람은 왔다. 세상은 그렇게 무심하게 이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 사이에 서 있는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손주를 품에 안고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마도 직접 이름을 지어주려 하셨겠지.

예전의 집안에서는 작명이라는 일이 단순히 부모만의 일이 아니었다. 특히 집안의 어른, 그중에서도 가장의 뜻이 중요했다. 이름은 그저 부르기 편한 소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앞날을 향해 가족이 함께 얹어주는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은 가장의 의무였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세상에 내놓는 말. 앞으로 평생 그 아이를 따라다닐 말. 그 말 하나를 정하는 일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할은 자연스럽게 내게 왔다.
나는 어느새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때 가족들은 저마다 하나씩 이름을 지어왔다. 누군가는 한자의 뜻을 말했고, 누군가는 발음이 좋다고 했다. 어떤 이름은 밝고 단정해 보였고, 어떤 이름은 큰 인물이 되라는 뜻을 품고 있었다. 이름 하나를 두고 가족들은 한자의 음과 뜻을 설명하고, 여러 번 불러보고, 성과 붙여보며 자기 생각을 말했다. 모두가 아이를 위해 진심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결정은 가장의 몫이었다.
그 가장은 바로 나였다.

물론 완전히 독단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가족들의 의견을 들었고, 여러 이름을 놓고 고민도 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내가 마음에 품고 있던 이름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아이의 이름으로 등록했다. 그 순간, 나는 단순히 서류에 글자를 적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인생 앞에 부모로서 첫 번째 문장을 써준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를 보면, 나는 그때의 결정을 꽤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자기 이름을 싫어하지 않고, 불편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인다. 이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민감한 것이어서, 잘못 지으면 평생 작은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아이가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이름 때문에 크게 해를 입은 적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아니, 적어도 많이는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가장 많이 걱정하는 것도 아마 그런 부분일 것이다.
이 이름으로 아이가 친구들에게 어떻게 불릴까. 놀림을 받지는 않을까. 성과 이름을 붙였을 때 이상한 말이 되지는 않을까. 이름을 띄어 읽거나 다르게 발음했을 때 우스운 뜻이 되지는 않을까. 부모는 이름을 지으며 뜻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 이름으로 세상 속에서 어떻게 불리게 될지를 상상한다.

그래서 성과 이름을 붙였다가, 떼어보았다가, 빠르게 불러보았다가, 천천히 불러보기도 한다. 비슷한 단어가 있지는 않은지,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바꿔 부를 만한 여지는 없는지, 혹시 해롭거나 우스운 소리로 들리지는 않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다. 그 과정은 어찌 보면 조금 유난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이름 하나에도 아이가 덜 다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간다.

이름은 그렇게 지어진다.

가족의 축복과 바람으로.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기도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대단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때로는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소박한 바람으로.
때로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꺾이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절실한 마음으로.

그래서 이름은 인생의 첫 번째 고귀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옷을 입히기 전에, 장난감을 사주기 전에, 학교를 보내기 전에 부모가 가장 먼저 주는 것.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향해 “너는 이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라고 건네는 첫 선물. 그것이 이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은 자라면서 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어릴 때는 이름이 전부였다. 친구들은 이름을 불렀고, 선생님도 이름을 불렀고, 가족들도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그 이름은 곧 나였다.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 사이에는 직접적인 온기가 있었다.

하지만 학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사회는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기보다 역할로 부른다. 직급으로 부르고, 직책으로 부르고, 관계 속 위치로 부른다. 누군가는 김 사장이 되고, 누군가는 조 실장이 된다. 누군가는 박 대표가 되고, 누군가는 이 과장이 된다. 이름은 사라지고, 성과 직함만 남는다.

물론 사회생활에서 직함은 필요하다. 조직 안에서 서로의 역할을 구분하고, 예의를 갖추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고, 직함은 적당한 거리와 격식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직함에 익숙해진다. 부르는 사람도 익숙하고, 불리는 사람도 익숙해진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그 직함이 나 자신보다 더 커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내 이름보다 내 직함이 더 중요해졌다. 누가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보다, 어떤 직함으로 부르는지가 더 신경 쓰였다. 명함에 적힌 글자가 나를 설명해주는 것처럼 느꼈고, 그 직함이 조금 더 그럴듯해지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이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곁에 있었지만, 직함은 내가 얻어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 근처를 지나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주 평범한 일이었을 텐데, 나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누가 감히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내 이름인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나는 그 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 닫아둔 방의 문이 갑자기 열린 것처럼, 그 이름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내 이름은 여전히 나에게 붙어 있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직함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해졌고, 나 역시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내 이름보다 내 직함이 더 돋보이기를 바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내 이름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기보다, 더 그럴듯한 직함을 가진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조금 부끄러웠다.

이름은 참 이상한 말이다.
태어날 때는 온 가족이 모여 신중하게 고르는 말인데, 사회에 나가면 점점 불리지 않는 말이 된다. 명함이 생기고 나면, 이름은 부르는 말이라기보다 바라보는 글자가 된다. 누군가의 입에서 살아 움직이기보다, 종이 위에 인쇄되어 있는 단어가 된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말이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이름보다 내 직함을 먼저 본다.

그런데 더 숙연한 사실은, 마지막에 가면 다시 이름만 남는다는 것이다.

납골당의 조그만 칸 안에 놓인 항아리.
그 곁에 적힌 이름.
때로는 작은 사진과 함께, 때로는 빨간 십자가와 함께 남겨지는 단어.

그곳에는 사장이라고 적지 않는다.
대표라고 적지 않는다.
실장이라고 적지 않는다.
부장이라고 적지 않는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이름이다.

생애 첫 번째 선물로 받은 이름. 가족들이 뜻을 따지고, 소리를 따지고, 삶을 축복하며 골라준 그 이름. 사회에 나가 한동안 직함 뒤에 가려졌던 그 이름.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덜 불리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조용히 앞에 놓이는 그 이름.

생각해보면 이름은 사람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다.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주어지고, 죽은 뒤에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다. 우리는 사는 동안 직함을 얻기 위해 애쓰고, 명함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더 높은 자리로 불리기를 바라지만, 결국 누군가 우리를 기억할 때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직함이 아니라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아이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그 이름이 아이를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아이가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이름 안에 가족의 축복이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한 가지 바람이 더 생겼다.

아이가 살아가면서 어떤 직함을 얻게 되든,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되든, 결국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명함 위의 직함보다, 사람들이 불러주는 자기 이름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낯설게 돌아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름은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이 마지막까지 품고 가는 가장 오래된 선물이기도 하다.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